본문 바로가기
타로, 명상, 글쓰기

독립의 감각 (1) 아침부터 저녁까지

by 동글머니 2023. 1. 26.
728x90
반응형

D-1 스스로 선택하기

 

회사 휴가 첫 날이자 이사 하루 전 날, 입주 청소를 불렀다

부동산 소장님이 추천해준 업체 A,B,C 각각과 통화를 하고 견적을 내본다

17+알파, 25만원, 30만원을 부른다. 너무 싼 업체는 추가 요금에 대한 설명이 장황하여 선택 하지 않는다

25만원 쯤 하는 B업체는 시간이 맞지 않고, C는 터무니없이 비싸다

내 방은 16평인데 이게 무슨 일이람. 

 

숨고에서 동일한 지역에 위치한 업체를 검색해서 22만원에 수배를 한다

인부 2명이서 반나절을 걸려 30년도 더 된 낡은 화장실에 광을 내고, 베란다도 쓱싹 청소해주셨다

그러는 동안에 묵은 마이너스 통장 대환대출 신청을 하러가서 반나절 기다렸으나 창구 대기 인원이 너무 많아 GG

 

스스로 업체 여러 곳에 문의하고 선택하고, 말끔히 청소까지 끝내버렸다

더는 타인의 장단과 박자에 맞추지 않고 온전히 행한 선택인지라 

풀 죽었던 마음에 자신감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던 하루였다

 

D-Day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

 

1.아침

 

완벽한 타인이 될 수 없기에 더 사랑하고 더 미워했던 우리 가족 4명 살던 집을 떠난다

'셋 그리고 하나' 해체 작업을 할 것이다

 

좁디 좁은 21평이지만 엉덩살이며 허리며 어깨, 온몸을 부딪혀가며 살던 집이다

새벽에 비몽사몽 눈을 떠 쌓인 짐을 보는데 울컥 감정이 북받혔다

우린 더는 이 집에 4명이 함께 모여 살지 않겠지

 

주거 환경의 마지노선을 이 집으로 삼고 싶었는데,

서울과 이 보다 더 많이 멀어지지는 않고싶었는데,

아마도 이 집에서 더 오랜 기간 살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않기로 선택했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복도식 아파트

짐이 하나 둘 꾸려지는 동안

그 복도에 앉아 보온병에 담아둔 커피 한 모금,

전 날 받아둔 호두과자 한 알을 챙겨둔 어머니와 나눠 먹는다

영하의 날씨 찬 공기지만 햇살이 강해 춥지 않았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만약 수 억원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평행세계의 우리 가족이 오늘 입주하기로 되어있었을 저 멀리 아파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복도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까지 함께 한다

 

아쉬움 한 모금, 미련 한 스푼, 아직 남은 죄책감과 고통도 바닥에 잔뜩이건만

마지막이라 이름 붙여두고 보니 못내 질척거리고 싶다

 

집 안에선 이삿집 센터 인부들이 부지런히 박스 포장을 하며

이 짐은 엄마 집으로, 이 짐은 딸 집으로, 분류하느라 바빴다

 

이삿짐 센터 대장 아주머니가 떨어져 나와 나뒹구는 화장실 문고리를 보며

"이건 버려도 되냐"고 몇 번이고 확인을 한다

 

온 가족이 돌아가며 갇히는 통에 아예 문고리를 떼어버리고,

문고리에 빈 둥그런 자리에 스카프를 얽어 맨 채로 2주 가량을 살았었지

 

"제가 집주인이에요. 버리셔도 돼요." 라고 하자

"집주인이었어? 딸인줄 알았더니?"

"딸도 맞고, 집 주인도 맞아요"

 

몇 마디 대화를 뜨문 뜨문나누며 마지막 남은 짐이 사다리차를 타고 내려갔다

텅 빈 공간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문단속까지 한다

여기 이 집에 다 담겨 있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입주하던 날 엄마랑 시켜먹은 짜장면과 탕수육

아버지가 사들고온 마치 어느 오두막에서 서리해온 모습으로 노끈에 얽어선 수박 한덩이,

덥고 추운 바깥 기온에 노출된 복도 현관문 때문에 온 가족이 집 안에 갇힌 일,

때론 눈치 없이 울어대는 현관문 도어락 때문에 시끄러워 깼던 일,

화장실에 갇혀서 안에서 두드려 탈출한일, 소소하게 부엌에서 울고 웃던일,

어김없이 돌아오던 제사, 친구들 중 그 누구도 초대한적없던 집

최근 6개월이 울음과 짜증, 기대와 실망으로 얼룩졌던 것 뿐

그래도 4식구의 보금자리론 참 마뜩했는데

 

'울고 웃던 시간들 안녕'

 

짐을 다 부린 후, 딸 집으로 사다리차가 먼저 이동하게 되었다

 

엄마는 딸 손을 꼭 붙잡고, "이제 잘 살자" 한 마디 하신다

애처롭고 사랑담은 눈망울로 바라보며,

미안함과 사랑, 부끄러움과 고마움을 담아 전한다

이미 울만치 울어 눈물은 나오지 않는데 눈시울이 붉어온다

 

택시를 타고 어제 깨끗이 치워둔 독립 청년장으로 이동한다

 

2.점심

 

12시 47분 택시를 타고 청년장으로 이동했다

이삿짐 센터 인부들이 오기 전 얼른 허기를 해결하고 계약서를 쓸 요량으로 

집 앞 편의점에서 대강 돌린 김밥 한 줄에 물 한 병을 헐레벌떡 마신다

12시 56분이다 부동산에 아직 집주인 분은 오지 않으셨다

 

어머니 또래에 인상 좋아뵈는 집주인과 부랴 부랴 환담 몇 마디를 주고 받고 서류에 싸인을 휘갈긴다

나만한 아들, 딸이 있으신양 대략적인 가족 이야기를 하며 신상을 파악해본다

못내 아쉬웠던 천장 수리를 부탁드렸는데, 흰 색 페인트로 칠을 해주시겠다 하셔서 맘이 좋았다

 

정신없이 가스비, 전기세, 수도요금을 정산하고 이삿짐 올리는 자리로 향한다

 

책장과 책상, 침대를 한 방에, 드레스룸을 나머지 한 방에 쓰려 계획한대로 가구를 먼저 배치해본다

홀로 16평을 쓰는 사치를 선물한다

4인 가구에서 떼어내온 1인 살림인지라 조촐하다 공간이 남아 돈다

 

자그마치 벽의 반이 비어서, 흰 벽이 생겼고,

모든 문을 열고 닫을 때 부딛힘이 없이 가구를 배치할 수 있었다

 

롸져! 도어웨이가 클-린 합니다!

 

대형 폐기물까지 처리하고 이삿짐 대장님이 "어머니 집으로 가냐"고 물어본다

나는 남겠다고 대답한다

 

이제 여기는 내 집이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는데 피로가 몰려왔다

평소라면 누워 뒹굴겠지만 그럴 수 없다

 

못내 더는 엄마 손길 탈 수 없어서 펑펑 한 번 더 울었다

 

피곤에 찌들었지만 청소기를 돌리고,

식기와 책, 전자 기기들을 원하는 자리로 잘 배열해본다

가스 기사 아저씨가 와서 가스 연결을 점검하고,

와이파이 연결할 전화를 걸고, 도어락 비밀 번호를 바꾸고, 복지센터 마감 시간을 확인해본다

대형 폐기물 스티커도 사보고, 분리수거 날짜 등도 파악한다

 

운다고 누가 해주지 않고, 모른다고 누가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혼자서 저만치 해냈다

써리썸씽의 나이에, 이사를 32번 넘도록 다니면서, 저 일을 혼자 해보다니! 세상에!

어쨌거나 작은 효능감이 스물 스물 피어올랐다

 

어지간한 살림 살이는 몽땅 끌고 나왔기에 응급 딱지 붙일만큼 급한 볼 일은 없다

4시 경 동네에서 별점이 가장 높은 중식당으로 가서 홀로 짜장면 한 그릇을 주문한다

마침 나 바로 앞에도 1인 손님이어서 일행으로 오해받은 거 외엔 온전한 한 끼였다

 

자취생의 친구 다이소에서 급해보이는 물건들을 30리터 바구니 한 가득 사서 집에 돌아왔다

 

3.저녁

 

마침내 홀로 된 저녁

오래된 아파트라 어르신들이 많이 사시는지 온통 고요하다

 

어둠이 내리는 저녁, 나는, 넓은 방에 홀로 누워 있다

고즈넉하고 온 사방이 나의 공간이었다

온전하고 완벽한 독립의 감각

 

타인의 물건 하나 없이 오롯이 내 물건으로 가득하고,

간혹 아이들 노는 소리, 고양이 우는 소리가 멀리 들려와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은 아니되

너무 가까운 벽 너머의 생활 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겨울 공기 가득한 방에 서서히 보일러로 데워져오는 따스한 기운

든든하게 찬 배

 

오로지 나를 위한 공간과 시간이다

내일을 위한 다짐과 계획을 어쩌면 잘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시간

 

아침에도 누군가 분주히 움직이는 소음이 아닌 오롯이 내가 내 바이오 리듬에 맞춰서 기상하게 되는 그런 축복

 

이런 것들이 독립의 감각이구나

나는 이제 정말 새로운 1인분의 삶을, 나만의 박자에 맞춰서 살아갈 준비가 되었구나

 

사랑하는 나에게 행복을 빕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